본문 바로가기

리뷰/기타서적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반응형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카롤린 라로슈, 윌컴퍼니


몇 년 전부터 돼지고기를 먹을 때마다 심하게 체해서 고생한다. 오늘도 하루종일 고생만하다 책을 들었다. 고기와 책이라니.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묘하게 연관이 있다. 명화라는 개념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고흐, 클림트는 알고 있어도 그림을 제대로 감상해 본적은 없는 것 같다. 한참을 읽은 뒤에야 제목이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라는 것이 떠올랐다. 몇몇의 그림은 넋 놓고 보았다. 


어쩌면 음악과 그림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음악은 12개의 음으로 클래식도 연주하고 재즈도 연주한다. 그림은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의 색과 흰색, 검은색의 향연이다. 똑같은 재료로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내용과 느낌이 달라진다. 


나는 티비를 잘 안 본다. 아니 예능을 안 본다. 해야할 것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프로그램은 「생로병사의 비밀」과 「동행」 그리고 크레파스 무지개였던가, 아니면 아름다운 무지개였던가. 「동행」과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생로병사의 비밀」은 어떤 주제가 나와도 재밌었다. 당연히 웃겨서 재밌는 것이 아니라 해당 병이 왜 발생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치료하는지 등의 과정이 재밌었다. 다소 어설픈 3D 그래픽 앞에서 손짓하며 얘기하는 진행자의 모습도 재밌었다. 실험 참가자들의 결과나 인터뷰도 재밌는 요소 증 하나다. 그러나 간혹 드라마를 보긴 했었다. 「그 여자」, 「토마토」, 「내 이름은 김삼순」등이다. 드라마 광인 친구 때문에 억지로 본 것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 본 드라마는 기억이 잘 안난다. 하여간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책 초반 부터 드라마가 생각이 났다. 이유는 아래와 같다.


최후의 만찬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최후의 만찬


앞은 절벽인가. 아니면 벽인지. 벽보고 식사를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나 그림이나 드라마나 관찰자의 기준에서 그려지는 것은 사실이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에서는 이런 구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한다.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 최후의 만찬안드레아 델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 최후의 만찬


개인적으로는 식탁보 표현을 제외하면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그림이 더 맘에 든다. 색감부터 뒤쪽의 타일 같은 표현이 타로카드 그림같은 일러스트적인 느낌이 난다.


💬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마지막 복원은 1978년부터 1999년까지 21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작업을 통해 작품은 원래의 색을 일부 되찾았고, 이전 덧칠들로 어두워진 배경의 창문이 환하게 복구되었으며, 르네상스 때 왕궁에서 유행한 테피스트리 특유의 꽃무늬 문양이 그려진 벽걸이들도 제 모습을 드러냈다.


E-Book으로 읽어서 정확한 페이지는 쓰지 못했다. 첫 번째 이야기인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내용이다.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하여 그렸지만 그림이 걸린 장소가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이라 습기 때문에 그림이 오래가지 못했다 한다. 현재는 복구되었다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고기 이야기를 해본다. 명화에도 고기를 주제로한 그림이 있다. 정확히는 고기가 아닌 소와 돼지다. 그러나 살아있는 소와 돼지가 아니라 도축된 소, 돼지의 그림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후엔 우리의 양식으로 삼는다. 동물의 감정도 인간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도 나름의 사회가 있으며 의사소통을 한다. 도축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고개를 돌리기엔 너무 잔인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된다. 건강 혹은 사이비적인 믿음 떄문이기도 하다. 많은 과학자들은 곤충요리, 인공육류 등 현재의 육류를 대체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요아힘 베케라르(Joachim Beuckelaer)요아힘 베케라르(Joachim Beuckelaer), 도살된 돼지


잔인하다고 해야할지 잘 그렸다고 해야할 지 모르겠다. 저 돼지가 실제 모델이라면 자기의 그림을 보고 뭐라고 할까.


렘브란트(Rembrandt), 도살된 황소렘브란트(Rembrandt), 도살된 황소


또 하나의 그림이 더 있지만 색감이 잔인하여 가려둔다. 


생 수틴(Chaim Soutine), 도살된 소



💬 도살된 황소


미술가 중에는 렘브란트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사랆이 아주 많다. 렘브란트의 작품 가운데 사실성과 강렬한 표현을 추구하는 화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오랫동안 상스럽게 여겨져 온 주제와 그 시각적 강렬함으로 동시대인들을 놀라게 한 그림, 바로 <도살된 황소>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주제와 색채의 관능성에 집중한 20세기 표현주의 화가 로비스 코린트와 생 수틴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그 그림에 반해 렌브란트의 현대성에 경의를 표했다.


...실제로 이 그림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제 막 생명을 잃은 피와 살의 꿈틀거림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렘브란트는 자신의 재능을 아름다운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화 자체를 위해 사용했다. 두껍게 칠해진 물감에는 붓이 지나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 흔적들은 해제된 짐승의 뱃속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를 그려내는 화가의 몸짓까지 떠올리게 만든다.


글쎄. 몇 년전인가. 독수리 옆에서 굶주린 아이의 사진을 찍은 작가가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진찍을 시간에 도와줬어야 하지 않나,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며. 해당 사진을 촬영한 케빈 카터는 사진을 찍은 뒤 아이를 바로 구해주었다고 해명했다. 말보다는 그림과 사진이 뜻을 전달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순간에나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핑곗거리가 되진 못한다. 저 아이는 자신의 모습이, 저 때의 순간이 전세계로 퍼져나간 것을 알까? 보도 사진이든 취미 사진이든 사람을 상대로 촬영할 때에는 피사체의 허락이 있어야 된다고 본다. 


아무 곳에나 사진기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너무 싫다. 픽사베이에서 사진을 구하다가 깜짝 놀란적이 있었다. 한국의 버스 안 사진인 듯 싶었다. 물론 사람들의 얼굴이 정확이 찍힌 것은 아니다. 발 부분이 담겼다.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퍼블릭 도메인으로 픽사베이에 올린 것이다. 픽사베이의 사진들은 상업적,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사용이 가능하다. 무슨 권리로 다른 사람들을 촬영하여 무료로 사진을 공개하고 배포하는지 어이가 없다.


셀카를 찍는 것도 그렇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셀카 안에 담기길 원치 않아할 확률이 높다. 누가 그런 셀카의 배경이 되고 싶겠는가? 카페나 버스 안, 지하철 안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지하철에 간간히 있는 전신 거울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나는 그러한 행위가 눈쌀이 찌푸려진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본인의 자유겠지만 사람이 지나다녀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면 생각없고 무식한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꼴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만큼이나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싫다. 


케빈 카터에 관해 검색하다가 다소 어이없는 글들을 많이 만났다. 보도 사진, 표현의 자유이라는 용어를 써가면서 아이를 구하는 것이 먼저인지 사진이 먼저인지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타인의 허락없이 타인을 찍는 행위가 너무 이상하다. 찍고 나서 도와줬다는 것도 이상하다. 도와준 댓가로 자신의 일에 강제로 참여하게 한 것이 아닌가. 자기 자식이라면 그렇게 했을까?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는 표절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같은 주제, 비슷한 구도로 그린 그림들 몇 가지를 제시하며 그에 관련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작가의 개인 감상이 아닌 그림에 얽힌 이야기다. 그림에 많은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 모든 그림이 재밌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정물화였다.


빌럼 클라스 헤다(Willem Claesz. Heda), Breakfast Table with Blackberry Pie빌럼 클라스 헤다(Willem Claesz. Heda), Breakfast Table with Blackberry Pie


책에 나와있는 그림과는 다르다. 책은 같은 작가의 블랙커런트 파이 그림이 있다. 구하지 못해 다른 것으로 올렸다. 그러나 같은 정물화로 비슷한 그림이다. 비가 내리는 어두컴컴한 오전에 찍은 사진 같다.


빌럼 클라스 헤다(Willem Claesz. Heda), Breakfast빌럼 클라스 헤다(Willem Claesz. Heda), Breakfast


같은 작가의 정물화다. 이번엔 따뜻한 햇살이 창문 너머로 비치는 것 같다.


팝아트 그림으로 넘어간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실려있다. 해당 그림을 검색하려는데 정말 놀라운 그림하나를 발견했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Collective Invention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Collective Invention


어릴적 살던 동네 사진관 유리창 넘어로 걸려있던 그림이다. 까맣게 있고 있다가 다시 보니 반갑다. 사진인 줄 알았는데 그림이었다니. 멀리서 봐서 자세히 본 것은 아니었지만 사진관에 걸려있으니 사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 진짜던 아니던 불쌍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림이라 다행이다. 르네의 그림들을 보면 눈에 익숙한 그림이 몇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그림에서 컴퓨터로 그린 느낌이 난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Time transfixed 그림은 3D 렌더링 느낌이다.


팝아트는 앤디 워홀이 유명하다. 그림에 대한 아름다움이 아닌 개념적인 표현의 선구자였다면 르네 마그리트는 팝아트 그 자체인 듯 하다.


르네 마그리트의 메모리와 또 다른 메모리는 베이퍼웨이브 아트를 떠올리게 한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디자인과 색감이 세련됐다. 무슨 얘길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모두 예쁘다.


어떤 책에서 봤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료로 얻을 수 있다고. 맞는 말이다. 모든 비용은 농축된 인건비라고 봐도 무방하다. 빵을 만들어 판매하려면 밀가루와 설탕, 버터가 필요하다. 밀을 직접 키우면 된다. 사탕수수도 직접 재배하고 소도 키우면 되겠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하기엔 벅차다. 마트에서 초코파이를 사더라도 이름모를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미 생을 마감했지만 세상이 멸망하기 전까지 이들의 작품은 남아 회자될 것이다.

반응형